원칙 또는 명제
살을 에이는 고통이건, 눈물 철철 뚝뚝 흘러내리는 슬픔이건,
어느 정도 깊이가 생기면,
무르익은 가을날의 괴일처럼 몸과 마음에 스며들고 젖어 들어 일부가 되고,
그 고통과 그 슬픔의 깊이와 넓이는,
어느 정도 느끼게 되고,
무능력처럼, 일상처럼 무감각해지는 듯 하다.
또렷하다.
그 깊이와 넓이는 조금도 틈을 내어 주지 않는다.
더 깊어지고, 더 넓어지고 그러므로 더욱 가슴과 목을 옥죄어 오는 느낌으로,
허겁지겁 생물적인 숨만 꼬박꼬박 쉬어야만 한다.
이미 살아 있는 생존과 생활의 모든 동력은,
'그사람'에게로, 그 '그리움'에게로 다 옮겨진 듯하다.
그 '그리움'말고는, 그 '현존'말고는 달리,
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.
세상의 어느 대상으로도, 어느 것으로도 가슴은 미동도 않는다.
바람에 슬쩍 착각처럼, 착시처럼 움직이는 아지랑이 만큼도 움직이질 못한다.
"절망은 알게된 사람의 잇새로 비어져 나오는 잔혹한 한숨처럼..."
언제나 그 절망은 무겁게 드리운 잿빛 구름이었고,
"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..." 뿐 이었다.
눈들어, 고개들어 바라다 보아야만 할 대상은 흔하지 않았다.
아예 없었다.
고개를 들다가도 고개를 돌리고 고개를 숙인다.
그래야만 했다.
......
그 '그리움'은 찬란하다 못해 '잇새사이로 탄성'이 쉼없이 비어져 나온다.
"신음섞인 탄성"이 나오고야 만다.
숨이 넘어갈 듯한 그 먹먹함을 안도의 한숨처럼 숨돌리게하고 다독여 준다.
신음소리 흘러나오는 고통스런 통증은 물론, 잉태되어 있다.
태생적인 그 '그리움'의 시작과 더불어...
그럴 수는 없어도 이야기로 듣는 '산고의 고통'처럼 아득한 그리움은,
바벨탑처럼 굴뚝의 높이만 자꾸만 높아지기도 한다.
그럼에도...
순간 닥쳐오는 그 감격이란,
두 손 두 팔 벌려 만세 삼 창의 울렁거림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.
사실, 엄연한 그 존재자체로의 사실이지만,
어느 대상이나 어느 그림같은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흔히,
눈에 비치는 그 대상이나 그 현상에 대해서,
눈을 통하고, 머리로 인지하고, 가슴을 울리는 감동을 경험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.
'그사람'은 엄연히 다르다!
그 객관적인 사실이 무슨 명제처럼, 원칙어린 법칙같은 객관성을 더해 준다.
'그사람' - 그 모습 자체로서 가슴을 파리한 떨림으로 해서
가슴이 깊이도 넓이도 알 수 없는 구멍을 파놓게 만들어 버린다.
그 '현존'의 위대성은, 그 찬란함은,
무슨 어떤 역설도 제기할 수 없는 그 자체이다.
"피타고라스 정리" 또는 "아르키메데스 원리" 만한 명제이다.
내게 있어서 '그사람'이란,
그저 오금 저리고, 다리 비비 꼬는,
그 진저리치는 감동은 '그사람'의 '예쁜 모습'에서 오롯이 비롯되기 때문이다.